코드와 아키텍처와 디자인이 ‘그런 것’으로 밀려난 시대. 구현을 모르는 기획자, 알면서도 책임을 미루는 기획자, 결정권만 놓지 않는 기획자를 심문한다. 그리고 끝내, 내가 존중하는 진짜 기획자가 무엇인지 묻는다.
PREFACE · 그런 것
이 호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패션 잡지 편집장과 촌스러운 신입사원이 싸우던 그 장면이 왜 지금의 IT 업계와 이어지는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디는 비슷해 보이는 두 개의 벨트를 앞에 두고 웃는다. 자기 눈에는 둘 다 똑같은 물건이다. 자신은 패션 같은 ‘그런 것’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태도다.
미란다 프리슬리는 앤디가 입고 있던 파란색 스웨터를 본다. 그것은 그냥 파란색이 아니다. 세룰리안 블루다. 그 색이 어떻게 컬렉션에 등장하고, 디자이너의 선택에서 백화점과 대중 브랜드를 거쳐, 마침내 앤디가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든 할인 매장의 스웨터까지 내려왔는지 설명한다. 앤디는 패션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자신이 비웃던 사람들의 선택이 여러 번 희석된 결과물을 입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무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다. 자신이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조차 알 필요가 없다고 믿는 태도다.
이제 스웨터를 서비스로 바꾸어 보자.
당신이 손에 쥔 조악한 앱, 주문이 끊기지 않는 결제 화면, 눈에 띄지 않게 이어지는 애니메이션, 장애가 나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구조, 사용자가 다음 행동을 고민하지 않게 만드는 버튼의 위치. 그 모든 것은 어느 날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실패하고 고치고 싸우며 깎아낸 결과다.
네가 ‘그런 것’이라고 부르는 그 조악한 서비스조차, 수많은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피를 흘려 깎아낸 세룰리안 블루다.
그런데 이십일 세기의 어느 순간부터 코드의 품질도, 디자인의 품질도, 서비스에서 무엇이 실제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도, 아키텍처도, 알고리즘도 ‘그런 것’이 되었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보다 그것을 어떤 표와 문장으로 보고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유일하게 ‘그런 것’으로 불리지 않는 직무는 기획과 경영인 듯 보였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는 기획자는 효율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그런 것조차 하지 않는 인간인가. 후자라면, 그는 왜 회사에 존재해야 하는가.
№ 01 · 에피쿠로스의 함정
기획자가 직접 코드를 짜고 디자인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건 직무의 통합이고, 내가 묻는 것은 판단의 자격이다.
외과 과장이 모든 수술을 직접 집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술이 무엇인지 몰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지휘관이 모든 총을 직접 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총알이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공격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기획자 역시 모든 코드를 직접 작성하거나 모든 픽셀을 직접 그릴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신의 결정이 코드와 화면과 운영에서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이름으로 전해진 오래된 역설의 형식을 가져오자. 현존하는 에피쿠로스의 글에는 이 문답이 없고, 후대의 락탄티우스가 그에게 돌린 형태로 남아 있다. 전능하고 선한 신과 세상의 악이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던 그 형식을, 기획자의 결정권에 대입한다.
기획자가 ‘그런 것’을 모른다면, 판단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자(Incompetent)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사결정에서 지우고 실무자에게 떠넘긴다면, 책임을 위장하는 기만하는 자(Deceiver)다.
자신의 역할과 무관하므로 알 필요조차 없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에게 결정권이 필요한 이유가 아직 입력되지 않은 NULL이다.
기획자가 ‘그런 것’을 모른다면 무능하다. 알면서도 지운다면 기만한다. 알 필요조차 없다고 믿는다면, 그가 조직에 존재해야 할 이유부터 다시 기획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출구가 더 있다.
모르면 하지 않아도 된다. 할 능력이 없으면 더더욱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와 함께 칼도 내려놓아야 한다. 이해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을 사람이 결정권만 쥐는 순간, 분업은 지휘가 아니라 인질극이 된다.
№ 02 · 멸시의 위임
이 역설은 머릿속에서 만든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이 장면에서 나는 관찰자가 아니었다. 당시 내 직함은 iOS 개발자였다.
본인이 보기에, 기획자는 너무 고귀해서 CS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기에, 미천한 iOS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화면을 정의하는 것도, 기능을 결정하는 것도, 기술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는 것도 잡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잡무는 개발자가 알아서 해야 할 ‘그런 것’이라는 이름으로 넘어왔다.
내가 넘겨받은 것은 코드만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런 것’이라고 부르며 밀어낸 책임까지 함께 넘어왔다.
이상한 점은 기획 업무가 하나씩 사라진 뒤에도 기획자라는 직함만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엇을 만들지 개발자가 알아서 정하고, 어떻게 보일지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알아서 해결하고, 사용자의 불만도 개발자가 직접 받는데, 결정권과 직함은 다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쯤 되면 질문은 거칠 수밖에 없다.
너는 개발도 하지 않고 디자인도 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어디서 들어와 어느 화면을 거쳐 구매를 끝내는지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회사에서 숨 쉬는 것 말고 무엇을 하는가.
대형 커머스 서비스들이 왜 구매까지의 화면 수와 이탈 지점을 집요하게 줄이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는가. 버튼 하나를 없애는 데 어떤 데이터와 설계와 이해관계가 들어가는지 모른다면, 적어도 그것을 ‘그런 것’이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
이것은 업무의 위임이 아니었다.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일을 하찮게 여긴 채 남에게 넘기는 것, 멸시의 위임이었다.
№ 03 · 두 사람만 남은 회사
조직은 그 위임을 바로잡았나.
아니다. 그 태도에 찬동하는 사람이 들어왔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씩 자리를 비웠고, 조직은 점점 작아졌다.
사람이 줄었다는 사실은 효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반대 의견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합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두 사람만 남은 상태는 운영 가능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작은 조직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두 사람이 회사를 운영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제품 전체를 만들 수도 있다. 나 역시 기획과 디자인과 개발을 함께 맡아 돈을 받는다. 문제는 인원수가 아니라 사라진 역할을 누가 수행하고, 그 책임을 누가 지는가다.
역할을 제거한 뒤 그 역할이 필요 없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은 효율이 아니다. 떠난 사람의 일을 남은 사람에게 숨겨 놓고 인건비가 줄었다고 말하는 것도 생산성이 아니다. 그것은 비용을 없앤 것이 아니라 장부 밖으로 밀어낸 것이다.
내가 그 사무실에서 그 둘의 대화를 들은 걸 기억나는 대로 쓰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이제 우리 둘만으로도 회사를 굴리고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이게 생산성이다.” 나머지 인원들을 모두 쫓아낸 개발자가 말했다.
“와, 너무 좋은걸요.” 기획자가 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둘에 대해 남긴 평가도, 내 기억에 남은 대로 이 자리에 적는다.
“일할 거면 혼자 하라고 해라. 말년에 옆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한 명도 없어서 망할 게 훤히 보인다.” 나보다 먼저 떠난 개발 책임자의 말이다.
“더 이상의 막말은 못 참겠다.” 나보다 먼저 떠난 웹 개발자의 말이다.
“한 번도 권력을 휘둘러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칼을 휘두르면 조직이 이렇게 망한다.” 나보다 먼저 떠난 관리 부서 동료의 말이다.
나는 그 둘을 지켜본 뒤 심리학을 공부했다. 저 둘은 도대체 왜 저렇게 작동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모호하지 않았다. 기획자의 행동은 자기애성 성격장애에서 설명하는 작동 방식과 겹쳤고, 개발자의 행동은 강박성 성격장애에서 설명하는 작동 방식과 겹쳤다.
서로 다른 두 패턴은 한 지점에서 합쳤다.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는 지점을 지키기 위해 조직을 줄이는 것. 반대하거나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씩 밀어내고, 더는 내보낼 사람이 없을 때까지 회사를 작게 만드는 것.
그들은 회사를 운영 가능한 최소 단위로 만든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취약함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작은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둘만 남은 사무실에서 그것을 생산성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정말 생산성이었는지는 당신이 판단할 일이다. 다만 당신이 경영자라면, 그 판단이 틀렸을 때 회사를 되찾을 계약과 변호사를 미리 준비해두었기를 빈다.
뭐, 이제부터는 다른 이야기다. 둘의 호흡은 놀라울 만큼 잘 맞았다. 각자 배우자가 있는 두 사람이 사무실에서 저토록 빠르게 서로의 확신을 강화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들의 집안과 관계가 이 호흡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름대로 분석한 바도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 이 글에 남기지는 않겠다.
다만 당신이 반려자보다 경력적으로 앞서 있거나, 경제적으로 더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왔다면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두 사람 사이의 격차가 집 밖에서 열등감과 권력욕으로 번역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밖에서 타인에게 떠넘긴 그 불균형의 대가가, 언제쯤 집 안까지 들이닥칠 것인가.
№ 04 · 칼을 내려놓는 능력
무능한 사람을 조직에서 몰아내자는 이야기인가.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을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할 능력이 없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잘할 필요는 없다.
대신 자신이 휘둘러서는 안 되는 칼을 내려놓아야 한다.
유능한 리더는 모든 칼을 잘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휘둘러서는 안 되는 칼을 알아보는 사람이다. 목표를 말하되 방법은 더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질문하되 답을 정해 놓지 않으며, 결과의 책임은 위로 가져가고 실행의 권한은 아래로 보낸다.
이 대목에서 위험한 역사적 비교 하나를 해보자.
독소전쟁 초기에 스탈린의 숙청과 중앙집권은 소련군을 파괴적으로 약화시켰다. 그는 계속 최고권력자였고 최종 전략 결정권을 놓지도 않았다. 다만 전쟁의 실패를 겪은 뒤에는 제한적이나마 토론과 피드백을 다시 허용했고, 총참모부와 경험 많은 지휘관을 계획과 집행에 더 많이 사용했다. 반대로 독일군은 초기에 임무형 지휘, 즉 상관이 목표를 제시하고 현장의 지휘관이 방법을 결정하는 문화로 강점을 얻었지만, 히틀러의 개입과 명령 고집은 전쟁이 갈수록 그 재량을 압박했다.
소련이 이긴 이유도, 독일이 진 이유도 이것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리더가 무엇을 모르는지 인정하는 능력과, 모르는 채로 칼을 휘두르는 욕구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로는 충분하다.
스탈린조차 실패를 겪고 조금이나마 배운 것을, 평시의 기획자가 끝내 배우지 못한다면 그 기획자는 무엇인가.
№ 05 · 보이지 않는 것들의 계보
‘그런 것’에 집착한 사람이 역사를 바꾸었다고 했다. 어떤 근거로 하는 말인가.
먼저 과장을 걷어내자. 보이지 않는 것에 집착한 모든 사람이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집착은 실패했고, 어떤 디테일은 정말 아무도 볼 필요가 없는 낭비였다. 집착 그 자체는 미덕이 아니다.
차이는 검증에 있다. 그 집착이 사용자의 경험을 바꾸었는가. 시스템의 속도와 안정성을 바꾸었는가. 다음 세대가 당연하게 여길 표준을 만들었는가.
스티브 잡스는 대학을 중퇴한 뒤 캘리그라피 수업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실용적인 쓸모가 없어 보였지만, 그는 훗날 그 경험을 매킨토시의 복수 서체와 비례 간격 글꼴에 옮겼다고 직접 회고했다. 사용자는 운영체제 내부의 글꼴 처리 구조를 보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로 컴퓨터 화면의 문장이 이전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은 안다.
잡스가 매킨토시의 내부 회로기판 배열까지 단정하게 만들라고 요구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구매자는 그 판을 볼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만든 사람은 안다. 숨겨진 면의 질서를 요구하는 태도가 언제나 사업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다만 애플이 무엇을 제품이라고 불렀는지를 보여준다. 껍데기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부까지 하나의 물건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존 카맥의 이름에는 더 유명한 전설이 붙어 있다. 『퀘이크 III』 소스에서 세상에 알려진 고속 역제곱근과 기괴한 상수 0x5f3759df. 흔히 카맥이 만든 마법의 한 줄이라고 소개되지만, 그 알고리즘의 계보는 더 오래되었고 해당 상수의 고안자는 그렉 월시로 추적된다. 그 코드 한 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3D 산업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정정은 오히려 논지를 강하게 만든다. 역사를 움직인 것은 천재 한 사람의 마법이 아니라, 수많은 엔지니어 사이에서 전해지고 개선된 보이지 않는 계산의 계보였다. 카맥의 진짜 업적을 한 줄짜리 주술로 축소하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아키텍처와 도구와 성능을 ‘그런 것’으로 만든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정교하게 그리자 누군가 이유를 물었고, 그가 “내가 안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다만 이를 뒷받침하는 확실한 당대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니 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장인의 태도를 설명하는 후대의 우화로만 사용하자.
그 우화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을 바꾸는 품질은 때때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다는 오만에서 시작한다. 단, 그 오만은 결과로 검증되어야 한다.
압도적인 품질은 ‘내가 안다’에서 시작하지만, 살아남는 품질은 ‘사용자가 달라졌다고 느낀다’에서 완성된다.
№ 06 · 항명의 대가
직군의 가치가 실제로 어떻게 결정되는지, IT 업계에 오기 전에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기자 시절의 일이다.
극도로 과중한 업무를 견디다 못한 편집디자인팀 전원이 사장실로 들어갔다. 집단 항명이었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회사의 모든 월간지 마감이 완료되는 이틀을 제외하고, 디자인팀에는 정시 퇴근이 보장되었다.
한 달 뒤 편집부 편집장이 술자리에서 터졌다. 여섯 명이 매달 월간지 세 개와 일간지 하나를 마감하고 취재까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두가 매일 야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과는 반대였다. 편집부 전원에게 한 달 동안 밤 열 시 이전에는 퇴근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공식 징계라기보다 괘씸죄에 가까운 보복성 근무 지시였다. 군대에서 정식 처분 대신 완전군장을 시켜 사무실에 세워두는 장면과 비슷했다.
같은 항명, 다른 대가.
회사는 항명이 얼마나 절박한지보다, 항명한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지를 먼저 계산한다. 분노의 크기가 아니라 직군의 교섭력과 지각된 대체 비용이 결과를 갈랐다.
지금 IT 업계로 시선을 돌리면 역할이 뒤집혀 보인다. 그 시절 밤 열 시까지 붙잡힌 편집부의 자리에는 iOS와 Android 네이티브 개발자, 웹 프론트엔드와 백엔드 개발자, 디자이너가 서 있다. 반대로 조직이 먼저 달래야 한다고 믿는 자리에는 기획과 관리 직군이 서 있는 경우가 늘었다.
예전에는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하고 전지전능하다는 AI가 등장한 뒤, 시장의 인식은 빠르게 바뀌었다. 코드와 아키텍처와 픽셀을 깎는 노동이 실제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AI가 바꾼 것은 대체 가능성 자체보다, 누가 대체 가능하다고 믿어지는지의 순서다.
경영진이 개발과 디자인을 버튼 한 번으로 교체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직군의 항명은 덜 위협적으로 보인다. 반면 요구사항을 정의하고 보고 체계를 점유한 사람은 여전히 조직의 입과 귀처럼 보인다. 그 믿음이 맞는지는 시스템이 멈추고 나서야 드러난다.
항명의 대가. 그 무게는 누가 더 고생했는가에서 나오지 않는다. 경영진이 누구의 부재를 더 두려워하는가에서 나온다.
№ 07 · 기획자는 무엇을 만드는가
지금까지는 기획자를 심문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진짜 기획자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좋게 읽은 최장순의 『기획자의 습관』에는 이런 취지의 문장이 나온다. 기획자는 육체적으로 오래 살 궁리보다 창작물 안에서 오래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한다. 틈틈이 밖으로 나가 술과 담배를 벗 삼으며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야 한다.
이 얼마나 지독하고도 정확한 전제인가.
물론 술과 담배를 권하거나, 기획자에게 야근과 자기파괴를 명령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책상과 회의실의 안전지대에서 나가 세상을 관찰하고, 자신이 내린 결정 때문에 실무자가 피를 흘린다면 그 결정의 무게를 자신도 함께 짊어지라는 말로 나는 읽었다.
좋은 기획자는 구현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이 본 세계를 구현의 언어로 바꾸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불가능하며 무엇이 비싸고 무엇이 위험한지 묻는다. 답을 들으면 계획을 고친다. 고칠 수 없다면 자신이 그 대가를 설명한다. 실패하면 실무자의 이름 뒤에 숨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의 관찰도, 판단도, 책임도 없이 엑셀의 빈칸만 채우는 사람의 결과물은 영원히 ‘그런 것’에 머문다. AI가 대신 만들어도 아무도 차이를 눈치채지 못할 찌꺼기다.
육체의 편안함이 아니라 정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자신이 본 세계를 끝까지 구현하겠다는 독기가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어디서도 못 본 것’이 된다.
나쁜 기획자는 자신의 직함을 영생시키려 한다.
좋은 기획자는 자신의 창작물을 영생시키려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숨 쉬는 것 말고, 당신이 이 조직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EPILOGUE · 문은 열려 있다
당신은 왜 계속 만들고 구상하는가. 창작자의 교섭력이 약해지고 그 대가는 더 무거워졌다고 말하면서도.
내 생각에 이제 창작자의 대가는 더 무겁다. 그래도 나는 창작하고 구상한다. 만드는 사람들이 손을 놓는 순간, 남는 것은 남의 일을 ‘그런 것’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창작자가 모든 것을 참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세네카는 『도덕서한』 제26서한에서 죽음을 숙고하는 일을 자유를 숙고하는 일과 연결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죽는 법을 배운 사람은 노예가 되는 법을 잊는다.”
제70서한에서는 현명한 사람은 살 수 있는 만큼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야 할 만큼 산다고 쓴다. 세네카가 말한 출구는 문자 그대로 죽음까지 포함했다. 이 글이 그 결론까지 권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이 빌리는 것은 권력의 핵심을 꿰뚫는 그의 시선이다.
내가 나갈 수 없다고 믿는 순간, 상대는 나를 소유한다.
현대의 조직에서 문은 대개 그보다 덜 최종적이다. 결정권을 돌려줄 수 있다.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다. 회사를 떠날 수 있다. 칼을 휘두를 능력이 없다면 칼을 내려놓을 수 있고, 칼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 밑에서는 내가 먼저 방을 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비상구가 있다’는 믿음은 위험한 염세주의가 아니다. 밀실 공포증에 걸린 현대인을 위한 실존적 방어기제다. 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방 안의 모든 요구를 생존 명령으로 착각하지 않는다. 부당한 지시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고, ‘그런 것’이라 불린 자기 노동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비상구는 삶을 버리라고 유혹하는 문이 아니다. 삶을 인질로 잡은 자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억이다.
문은 열려 있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만이, 문을 잠근 자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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